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5호(2023년 1월 15일 발행) 7면 〈영가 사람들 — 안동의 경제인〉 다섯 번째 회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인물을 '정현섭'으로 잘못 적었던 것을 지면대로 정현모(鄭顯模)로, 필자를 정윤호로 바로잡았습니다. 원문에 '대공광업사'와 '대동광업사'가 섞여 적힌 부분은 지면대로 두었습니다.
안동 출신 경제인·기업가 중에서도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챙기던 안동 선비정신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요즘으로 말하면 기업의 ESG를 앞서 실천해온 경제인·기업가들, 그들의 역정과 활동상을 찾아본다.
前 안동MBC 보도국장 정윤호
정현모(鄭顯模, 1894년 ~ 1965년)는 기업인이자 정치인이었다. 해방 전에는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기업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제헌의원과 경북지사, 충북지사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임하 현하 출신의 그는 협동학교와 보성고보,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근대식 경영기업을 배운 그는 귀국 후 곧바로 권태연이 주도한 주식회사 안동주조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1920년대 중후반, 안동주조의 배당률은 연 20%에 달했다. 5대 주주(지분 8%)였던 정현모도 목돈을 거머쥐었다. 1930년에 그는 주식회사 안동곡자에도 주주겸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1930년대는 정현모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거액의 종자돈을 마련한 그는 대구와 마산·천안·경성 등으로 행보를 넓혔다. 1932년 3월 대구에서 남선금융(자본금 5만원, 요즘가치 10억원)을 창업하고, 1936년에는 마산으로 진출해 정미업과 건축업 등을 겸한 선남흥업(자본금 8만원)도 설립했다.
1937년은 그야말로 '스트라이크 페이더트(Strike Paydirt)'. 조선의 3대 광산(금광)왕 이종만과 만났다. 그해 6월 경성의 한 여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종만이 대공광업사와 대동농업사 창립을 알렸다. 대공광업사의 자본금은 무려 300만 원, 대동농업사는 50만원이었다. 정현모는 대동광업사의 상무겸 경리과장으로, 또 대동농업사와 대동출판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마산에 마산약주(자본금 20만원), 천안에 천안양조(자본금 13만원)도 창업했다. 해방 때까지 그가 직접 경영한 회사는 경성과 대구·마산·천안·안동 등지에 무려 10개였다. 4개 회사는 대표, 6개 회사는 주주 겸 이사였다.
1920년대, 정현모는 안동출신의 독립투사 이옥(李鈺·안동 도산 출신)과 의기투합했다. 신간회(新幹會·1927년 창립된 좌우합작 항일단체) 창립을 주도한 이옥이 경성에서 총무간사로 활동하자, 정현모는 동산 류인식의 뒤를 이어 신간회 안동지회장을 맡았다. 신간회 창립 이듬해인 1928년에 이옥은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현모도 신간회를 떠나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정현모와 이옥은, 고향 친구이자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 동문이었다.
해방이후 정현모는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안동 乙구' 제헌의원이 됐다. 5개월만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경북도지사가 됐다. 1950년 1월 경북도지사직을 사퇴한 뒤,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독립투사 김시현에 밀려 낙선했다. 2년 뒤, 그는 다시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충북도지사가 됐다.
— 정윤호 / 前 안동MBC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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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5호 (2023년 겨울호) 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