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 김동삼 —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이끈 만주벌 호랑이

영가 사람들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 안동대 명예교수 김희곤

2023年 04月 15日글 · 김희곤

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6호(2023년 4월 15일 발행) 6면 〈영가 사람들〉을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필자를 '편집실'로 적었던 것을 지면대로 김희곤으로 바로잡았습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나.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一松 金東三 유언)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 안동대 명예교수 김희곤

어느 시대나 풀어야 할 과제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거나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바로 그 일에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건 인물이 일송 김동삼이다.

1907년 29세에 안동 내앞마을에 협동학교를 세워 나라 살리기에 발을 디딘 그는 30년 동안 오로지 민족의 독립에만 매달렸다. 33세가 되던 1911년 가족과 문중,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경학사와 신흥학교를 세우고 백서농장이란 비밀병영을 책임지면서 독립군 조직을 이끌었다. 41세가 되던 1919년,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39인,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제1회 임시의정원 참가자 29명 속에 그가 있었다.

같은 무렵 한족회 핵심간부요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만주지역 최고지도자 반열에 자리를 잡고, 통의부 총장이 되어 독립군 통합에 힘을 쏟았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그 위상이 두드러졌다. 1924년 정의부 조직에 이어, 1927년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이끌고, 50대에 1928년 3부 통합회의를 선도하였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공 직후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서울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59세에 순국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시대의 벽을 넘은 진보성과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는 통합성에서 돋보인다. 독립운동 전반기에 군주제에 머물던 보수가 아니라 공화제를 지향한 계몽운동에 앞장서는 진보성을 보였다. 그것도 가장 보수적인 안동사회에서 그랬으니 더욱 높이 평가된다. 1919년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시킨 사실도 그 연장선에 있는 일이다. 40대 나이에 들어서는 민족독립에 최고 가치를 두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차이를 넘어섰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래 열렸던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을 맡은 것이나,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좌우통합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가 된 것도 그의 능력과 지향을 말해준다.

독립군 단체들이 갈라질 때마다, 수습하는 모임에 대표를 도맡은 인물이 바로 김동삼이다. 일찍이 만주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만주 한인 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지 않은 지도자가 드문데,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은 큰 인물이었다."고 증언했다. 김동삼은 이런 지도자의 풍모를 가졌다.

온 나라가 성격도 명확하지 않은 이념 차이를 내걸고 갈가리 찢어지고 있는 오늘, 통합을 이끈 지도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절실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어느 때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상황에서 오로지 민족 독립을 향해 대통합을 이끈 지도자 일송 김동삼의 존재와 위상이야말로 더욱 두드러진다. 지금 그를 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김희곤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 안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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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6호 (2023년 봄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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