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4호(2022년 10월 15일 발행) 8면 〈영가 사람들 — 안동의 경제인〉 네 번째 회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인물을 '권용철(權容哲)'로 잘못 적었던 것을 지면대로 권중렬(權重烈)로, 필자를 정윤호로 바로잡았습니다.
前 안동MBC 보도국장 정윤호
권중렬은 1922년 주식회사 안동주조를 창업한 세칭 권참사라고 불리던 국담 권태연의 장남이다. 그는 일본 도쿄의 아자부(麻布)중학교를 거쳐, 경성 선린상고와 보성전문 상과, 와세다 대학 본과를 졸업한 뒤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 기미년(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1920년대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부친이 창업한 안동주조는 만주와 대만까지 소주를 수출할 만큼 성장을 거듭했지만, 정작 그의 관심사는 지역의 사회문제에 있었다.
그는 1920년 불거진 우치교(吽哆敎·종교모임을 앞세워 독립운동 도모)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고, 당시 대지주의 아들로는 보기 드물게 농민회와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7년 신간회 안동지부를 조직한뒤 선배 정현모를 지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사실상 신간회 활동을 주도했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농민·노동·여성·청년·형평운동과 연계한 대중 계몽운동에 나섰고, 활동의 중심에 있던 그의 행보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부친 권태연이 나섰다. 1931년 권태연은 권중렬을 안동주조의 지배인으로 앉혔다. 1935년에는 안동국자(安東麴子, 누룩회사)의 이사에도 등재했다. 부친의 사업에 발이 묶인 그는 결국 사회운동을 접고 그때부터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나이 40이 되던 해, 그는 자본금 5만원(요즘가치 10억원) 규모의 주식회사 남선약업(안동읍 서부동 199)을 1935년 2월에 창립했다. 자본금으로 보면 안동주조와 맞먹을 규모였다.
안동지방에는 예로부터 한약초재가 다량 산출되므로...(중략) 자본금 5만원으로 남선약재회사 창립을 발기하야...(중략) 한약의 건재 도매를 비롯하야 일반 신구 제약판매도 겸하야 앞으로 복약자에게 많은 편의를 주게 되리라 한다. (1935.1.30. 동아일보)
남선약업의 경영과 안동국자의 주주로 사업을 확장하던 그는 식육판매와 식당을 겸하는 주식회사 안동식육판매(안동읍 서부동 149)도 1940년 7월20일 창립했다. 자본금은 6만원. 식육도소매와 식당을 겸하는 운영방식은 식육판매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경영시스템이었다. 아마도 이 회사가 안동지역 최초의 식육식당이었을 터였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이후 더이상 민감한 사회운동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교육과 체육 등 지역 현안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선배 기업인들과 함께 주도한 안동체육협회의 창립은 안동체육계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경북 안동에는 아즉 체육단체가 없어서 유감으로 생각하든 바...(중략) 당지 정구패왕인 김복인군이 전일본 정구선수권대회에서 40여 단체를 모조리 깨트리고 당당하게 개선함에 자극을 받아서...(중략) 지난 22일 안동군 회의실에서 안동체육협회의 창립총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하리라 한다. 회장 유시환, 평의원 권중렬 등 (1936.8.28. 조선일보)
도쿄와 경성 유학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알았던 지식인 권중렬은 사회운동가였을까 아니면 근대적 기업가였을까. 그의 눈에 비친 일제강점기 안동의 현실은 술을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기업과 그 반대편에서 지게미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굶주린 아이들의 피눈물이 아니었을까. 부잣집의 맏아들 권중렬은 그 중간쯤의 어느 지점에서 일제가 만들어낸 시대의 참상을 목도하고 있었다.
— 정윤호 / 前 안동MBC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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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4호 (2022년 가을호) 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