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8호(2023년 10월 15일 발행) 8면에 시작한 연재 〈安東春秋 100년〉 첫 회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안승춘'으로 적었던 필자는 지면대로 정윤호 前 안동MBC 보도국장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연도 표기 '갑오(1895년)'는 지면대로 두었습니다.
이번호부터는 1910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경술국치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역사속에서 안동의 시대상과 그에 따른 안동인들의 활약상을 정윤호 전 MBC 보도국장이 당시의 기록을 더듬어 맛깔스런 문장으로 들려주게 됩니다.
前 안동MBC 보도국장 정윤호
경술년(1910년), 나라가 망했다. 황제를 칭하며 제국을 꿈꿨던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조선부흥의 원대한 포부는 제국 성립 13년 만에 스러졌다. 백일몽이었다. 논리는 정연했고 의지는 강고했으되, 시세는 통찰하지 못했다. 광무(光武·고종의 연호)와 융희(隆熙·순종의 연호) 꿈은 짧았고 애달팠다. 군주는 나라였다. 임금이 없으면 나라도 없었다. 국망(國亡)을 견디지 못한 선비들은 목숨을 버렸다. 시세를 읽었던 선비들은 나라를 버렸다. 망국을 주도한 제국의 대신들은 일제의 귀족으로 변신했다. 이도 저도 못한 이들은 죽은 듯 살았다.
한양 사는 안동 양반들이 구한말 국정을 농단할 때, 안동 사는 안동선비들은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았다.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는데, 서산 낙조에 눈물겨워 했다' 갑오변란에 의병을 일으켰고, 을사늑약에 절망했고, 경술국치에 목숨을 버렸다. 공맹(孔孟)은 시렁에 얹고, 나라 찾는 일에 재물을 팔았다. 반상(班常)이 모두 의병이었다. 이름도 성도 없는 오직 의병이었고, 살아서 죽어서 모두가 불꽃이었다. 갑오(1895년)에서 경술(1910년)까지 16년, 안동의 의병은 세 갈래로 길을 걸었다. 척사유림(斥邪儒林)은 갑오·을미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거의소청擧義掃淸).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자정치명自靖致命), 일부는 만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했다(거지수구去之守舊). 후대는 거지수구의 행렬을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 했다. 향산 이만도는 자정치명했고, 석주 이상룡과 백하 김대락은 거지수구의 길을 걸었다.
1910년대는 서럽고 아득했다. '오직 의병'들이 떠나버린 안동은 음울했다. '인걸은 없는데, 산천은 의구했다.' 혼군(昏君)이라도 좋았다. 나라 있던 시절이 태평연월이었다. 일제가 발톱을 드러냈다. 근대화를 표방한 난도질이 터의 무늬를 지웠다. 조선의 고을을 상징하던 안동읍성이 헐렸다. 읍성의 붕괴는 망국의 징표였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었다.
토지조사를 앞세운 척지와 식민놀음이 시작됐다. 땅을 개발해(척지·拓地) 백성을 잘 살게(식민·殖民) 하는 회사, 동양척식회사가 남의 땅을 갖고 놀았다. 척지는 강탈이었고, 식민의 수혜자는 황국(皇國)의 신민이었다. 서러운 시절이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읍성이 있었던 서부동과 동부동 토지소유자의 보유면적을 조사하였다. … 서부동과 동부동의 전체 면적은 14만8648평이며 이 중에서 국유지 3만6447평, 동양척식회사 소유 7836평, 일본인 소유가 1만2356평으로 이는 전체 면적의 38.1%"(김기철, 안동 도시 공간 구성의 변천에 관한 연구, 대구대 대학원 2013)
국망의 상처는 깊었다. 싸우고 절망하고 절명(絶命)했지만, 나라는 없었다. 새로운 의병을 길러낼 시간이 필요했다. 안동의 의병은 근대식 교육으로 방향을 틀었다. 의병의 후예들은 경부선에서 책을 들었고, 경의선에서 총을 들었다. 청년들은 '살아서 죽어서 불꽃'이 될 새로운 의병으로 성장했다. 반상과 양천(良賤)이 모두 의병이었다. 읍성이 사라진 폐허의 땅에서 젊은 의병들은 외적·내적 변화를 주도했다. 민국(民國)의 맹아(萌芽)가 싹트고 있었다.
— 정윤호 / 前 안동MBC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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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東春秋 100년 다음 회 (8-9호)
출처: 《영가회보》 8-8호 (2023년 가을호) 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