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4호(2022년 10월 15일 발행) 10면 〈안동문화 산책 2〉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필자를 '남승룡'으로 잘못 적었던 것을 지면대로 남승섭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안동에는 관광자원으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다른 지방에 비해 풍부하다. 하나하나 겉으로 드러난 매력과 함께 안동 고유의 문화와 정신이 배여 있다. 볼거리에 인문(人文)의 옷을 입혀 그 뒤에 숨어 있는 설화,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남승섭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의 특별기고로 연재한다.
남승섭 —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 한국정신문화재단 사무처장, 21세기 인문가치포럼 조직위원, 경상북도청년유도회장, 하회마을 문화유산등재 추진위원
안동시군 통합전의 안동군기
안동이 시·군으로 분리되기 전 안동을 상징하던 안동군기(郡旗)는 녹색바탕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뜻하는 가로3줄 세로5줄의 흰색선이 그어져 있었다. 흰색선 중에서 가로줄 3줄은 삼강을, 세로5줄은 오륜을 뜻했다. 그리고 선에서 표시되는 교차점 15개는 당시 안동 15개 읍·면을 의미했다. 당시의 안동의 지리적 환경과 유학적 정서를 잘 담아낸 군기였다.
이처럼 안동의 지리적·인문적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초대 안동민속박물관장이자 향토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류희걸 선생께서는 안동의 삼다(三多)를 '산다(山多)·인다(人多)·원다(院多)'로, 삼무(三無)를 '만석거부·송덕비·성내거주향리'로 정했다. 그렇게 설정한 배경을 들어보면 안동에는 산과 사람과 서원(書院)이 많고, 큰 부자(巨富)와 송덕비(頌德碑)와 성내에 거주하는 향리(鄕吏)가 없다고 했다. 6가지 중에서 지리적 자연환경 요인은 산 뿐이며, 나머지 5가지는 사람과 관련된 인문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안동은 유형보다는 무형의 자산 즉, 정신문화에 기반을 둔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삼다삼무는 각 지방마다 지역 특성을 표현하는 의미로 잘 활용되고 있는데, 삼다도 제주는 바람·돌·여자가 많은 것이 대표적이다.
3다
△산다(山多) 산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높지도 않은 산을 깎아서 평지로 쓰기에는 좀 어정쩡한 안동의 산. 이러한 산에서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터득한 안동인의 품성은 북한산·관악산의 앙칼진 돌산을 닮은 소위 '서울깍쟁이'와는 차별화되니 안동 산의 후덕한 음덕이라 하겠다.
△인다(人多) 안동도 이제 인구감소 위기에 자유롭지 못하나 예로부터 '동국인물 반재영남이요, 영남인물 반재안동(東國人物 半在嶺南이요 嶺南人物 半在安東)이라'했다. 즉 '우리나라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안동에 있다'고 했다. 인구수보다는 국난극복과 구국에 앞장선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 인재의 보고, 선비의 고장,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회자된다. 즉 사람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원다(院多) 서원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원 673곳중 영남에 343곳, 경북에 229곳, 안동에 49곳이 있으니 안동의 원다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서원은 지방사립대학격인 교육기관이다. 사립대학의 50%이상이 영남에 있고, 그중에서도 안동이 지방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을 보유했으니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는 교육도시로서의 위상이 객관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3무
△만석거부(萬石巨富)가 없다 큰 부자가 없다는 것이다. 예부터 안동에는 산이 많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적어 만석거부가 없었으나 '재빈도부(財貧道富)고을'이라 했다. 비록 살림은 가난해도 윤리·도덕을 숭상하는 마음만큼은 부자라 했으니, 이런 선비들이 살아가는 산 많은 고을 안동이 물욕과 치부와는 거리가 멀어 만석거부가 없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송덕비(頌德碑)가 없다 송덕비는 관리(官吏)가 부임해 공직자로서 소임을 마치고 떠난뒤 그의 업적을 기려 백성들이 세워주는 비석이다. 개인 업적을 소수인의 의견으로 세우는 공적비와는 성격이 다르다. 유독 안동인들이 송덕비를 세우지 않은 것은 인심이 각박해서가 아니라 공직자는 백성을 위한 선량한 책무 즉, 선정을 베풀 의무가 있으므로 소임을 행한 공직자를 굳이 송덕비까지 세워 추앙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안동인의 생각이었으며 정신인 것이다.
△성내거주향리(城內居住鄕吏)가 없다 향리는 지방관청에 근무하는 관리 즉 아전(衙前)으로 이들은 성내에 거주하지 않았다. 일과를 마치면 자택이 있는 성(城)밖으로 퇴청해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 선정을 베풀도록 했다. 예로부터 안동의 향리들은 민의수렴 역할을 충실히 하며, '사군 무위유범(事君 無僞有犯)' 즉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항거는 하되 허위 보고는 하지 않는다'는 공직자로서 강직한 성품과 기강을 견지하며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선도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요즘 공무원들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다.
안동을 상징하는 '삼다삼무'가 안동 특성을 충분하게 표현해내는 데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형의 자산 즉 정신문화에 인문의 옷을 입히는 영가마당이 더욱 활성화되고 영가 제현의 안동문화 이해와 산책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남승섭 /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
함께 보기
- 안동문화 산책 1 — 안동팔경(安東八景) (8-3호)
출처: 《영가회보》 8-4호 (2022년 가을호) 1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