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안동 혁신유림의 지향과 21세기 대한민국 〈中〉

〈영가칼럼〉 김승종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학술이사 · 《영가회보》 8-10호 8면

2024年 04月 17日글 · 김승종

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10호(2024년 4월 17일 발행) 8면 〈영가칼럼〉 연재 두 번째 회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 제목 앞의 '[김승종의 안동춘추 100년]'은 지면에 없는 표기라 뺐습니다.

김승종 김승종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학술이사

'협동학교' 설립을 주도한 지사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모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처럼 영남 전통유학의 계승자들이기도 하였다.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선생은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선생의 제자였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척암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선생의 제자였다는 사실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09년 가을에 협동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은 수구 유림의 격앙을 고려하여 그간 유보했던 단발(斷髮)을 단행하였다. 물론 류인식·김동삼(金東三) 선생도 그 대열에 있었다.

1910년 8월29일에 민족 최대의 국치가 있었다. 이듬해 1911년 3월30일에 제1회 협동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같은 해 1월에 망명한 동문 석주 선생과 족숙 김대락(金大洛) 선생에 이어 김동삼 선생은 우선 졸업생 김병대·김성로·김문식 등을 대동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안동 혁신유림의 목적은 이미 설정되어 있었다. 1909년에 일송(一松) 김동삼 선생이 신민회 회의에 참석하여 의결하였던 지표인 '만주에 무관학교를 포함 독립운동 기지를 세워 무력을 양성하고 국내로 진공(進攻)하여 공화제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 이념이 옳아 행동하기도 하지만, 인식과 행동은 별개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후 갖은 역경과 신산을 거쳐 1919년 11월에 일송 선생은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 참모장 직책으로 군사와 신흥무관학교를 관할하였고, 1920년 초에 북로군정서에 교관을 파견하고 지원하는 실무를 총괄하였다. 9월9일에 배출된 첫 졸업생 298명은 북로군정서의 주력이 되어 10월 청산리 대첩에 기여한다.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만주 독립군이 궤산 쇠락하자 1922년에 그 권토중래를 위해 대한통군부에 이어 만주의 8단9회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발족을 주도하고 총장에 추대되었다. 1924년 3월10일에 대한통의부는 내외에 '포고문'을 반포하였다. 독립신문에 게재된 포고문에는 독립운동 지침과 방략, 그리고 일제를 몰아낸 이후 광복 대한민국의 국체(國體) 관련 청사진도 제시되어 있다.

'우리의 사업은 민권을 신장하며 민지(民智)를 계발하며 민력(民力)을 증진하며 민심을 단결함이 강령이오, 생계를 개척하며 교육을 발전하며 군실(軍實)을 양성하며 재정을 연구하며 주의를 선전하며 적세(敵勢)를 방어함이 그 절목(節目)이라. 미래의 우리 운동은 과거에 우리 운동과 그 궤도가 어떠하며 또한 그 계통이 어떠할까? 원래 유일의 목적인 정신점(精神點)에서는 일호(一毫)의 이동(異動)이 없을 지라도 그 진행의 방침은 괄목의 손익이 있다 할지니, 그 예를 들자면 소극을 적극으로, 의구(疑懼)를 신념으로, 계급을 평등으로, 독재를 합의로, 요행을 근본으로, 국부(局部)를 대동(大同)으로, 소규모를 대범위로, 파괴를 행하되 건설적으로, 진취를 도모하되 조직적으로 함이 곧 우리의 자유를 만회하며 독립을 완성하는 정연(井然)의 노정(路程)이라. 세계 하인(何人)이든지 이를 저지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아가 결투함에 주저함이 없도다.'

〈1924년 3월10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포고문〉

〈下편으로 이어짐〉

— 김승종 /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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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10호 (2024년 봄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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