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9호(2024년 1월 22일 발행) 8면 〈영가칼럼〉을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김희동의 연재칼럼] 김희동'으로 적었던 필자는 지면대로 김승종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학술이사로 바로잡았습니다.
김승종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학술이사
작년 10월27일에 경기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강당에서 한국서원학회가 주관한 2023년 학술회의 '호계서원과 조선후기 영남공론'이 개최되었다. 학자들이 발표를 마치자 패널들이 질의하였다. 그중 하나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안동의 선비 일단(김대락·이상룡·유인식·김병식·김후병·김택로·하중환·김형식·김만식·김동삼 등)을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 하는데, 어째서 그러한 규정이 가능한가. 반상(班常) 신분제 유제(遺制) 철폐를 주장하고 실천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런 지향과 실천이 있었다고 듣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민감한 문제 제기였다. 반상타파는 당대의 요청이면서도 이전과 일거에 구획되는 혁신의 자질이다. 다른 변화도 혁신 운운할 수 있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일제가 승전을 거듭해 망국의 기운이 짙어지던 그 전후에도 만약 그들을 포함해 안동 유림이 계속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일관하였다면 어떠했을까. 아무리 1895년 이래 의병을 일으키며 분투하였어도 그 기반이었던 안동의 유학은 이후 역사에서 유야무야, 심지어는 기피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 안동인의 항일투쟁과 호계서원'을 발표한 강윤정 안동대 교수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답변하였다. "아시다시피 안동의 혁신유림은 주위 보수유림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1908년 3월에 드디어 호계서원의 재산을 재원으로 하여 협동학교를 설립하였고, 과학·군사 교과 위주의 '신교육(新敎育)'을 실시하였는데, 그 추진에는 이 시기 안동 혁신유림의 '국민' 인식과도 관련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상민(常民)도 입학할 수 있다는 입학 자격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협동학교 설립 지향 자체에 이미 반상타파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확실한 증빙이 궁금하였다. 그러다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1908년 10월에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할 때 썼다고 추정되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에서, '국민'과, '국민의 의무'와 단합을 토대로 한 '국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한협회는 대한 국민의 정당으로서의 회의체이다. … 스스로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국세를 비관하고 앞날을 절망한 소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장래에 어찌 영 진흥하지 못할까. 일찍이 들은 바, 국가는 국민의 단체이며 국민이 강력하면 국가가 강력해지고, 국민이 취약하면 국가도 취약해지며, 국민이 모이면 국가가 공고해지고, 국민이 이산하면 국가도 공허해진다. 국가를 대망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반드시 국민을 단합시킨다.
오늘 민주주의 '국민' '국가론'과 거의 일치한다. 석주 선생의 이러한 인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고, 취지서의 성격으로 보아도 선생 개인의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당시 항일 국난타파 운동에 동참한 주위의 여러 동지들과 공유하던 '개명전도(開明前途)'의 등불이었다고 하겠다. 국민의 단합을 특히 강조하는 이 천명에서 우리는 반상타파는 물론 그 이상의 대동의식과 각오로 국민과 국가의 '진흥'을 기구한 안동 혁신유림, 그 가슴과 머리에서 솟구치는 호연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참고로 석주 선생은 한말의 대유이며 1895년 안동 을미 의병 봉기를 주도한 한 분인 서산 김흥락 선생의 제자라서 이러한 전환은 더욱 뜻깊다.
〈中편으로 이어짐〉
— 김승종 /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학술이사
함께 보기
- 〈中〉편 (8-10호)
출처: 《영가회보》 8-9호 (2024년 겨울호) 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