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嘉會 孕胎(잉태) · 出産(출산) · 幼兒期(유아기)

회원 기고 — 장원석

2026年 05月 13日글 · 장원석

편집실 안내 — 《영가회 40년사》 329~334쪽에 실린 장원석 회원의 기고문입니다. 필자는 원양선 해기사의 항해일지 기록 습관으로 1958년부터 60년 가까이 일기를 써 왔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책 29~32쪽에도 같은 필자가 쓴 다른 기록이 있는데, 날짜와 인원이 서로 다릅니다(두 기록 비교).

1. 영가회 孕胎(잉태)

1차 모임 — 1976년 9월 12일, 용수산

1976년 8월 5일, 일본 거래처 인사의 방한으로 저녁 늦게까지 손님 접대로 지친 몸으로 귀가했더니 안동의 김병희(안동중학 2회 출신)씨가 세 번이나 전화가 왔다고 했다. 용건은 청와대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유는 안동중학교 동창회 결성 관계였다.

거절했으나 거듭 요청이 와서 류 수석에게 전화로 용건을 전하자, 9월 12일 12시 용수산 식당(청와대 부근 한정식집)에서 만나자고 승낙해 주었다.

1976년 9월 12일, 김병희씨와 이상두씨(안동중학, 류 수석과 동기생)가 함께 왔다. 식사를 하면서 김병희씨가 용건을 말했으나 류 수석은 업무상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자체에서 잘 해 보라며 사실상 거절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1950년대 안동 3개교 동창들이 얼굴을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친목 모임을 주선해 볼 테니 측면에서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류 수석은 "좋은 일이나 안동 사람들 모임은 어려울 것"이라 답했다. 우리 선배들도 수차 모임을 해 보았으나 3회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필자가 그런 점을 감안해 한번 시도해 볼 테니 아무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모임 참석만 해 달라고 간청했고,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성사를 위하여 건배를 하고 헤어졌다.

이날이 영가회가 잉태하던 날이었다.

(김병희씨가 애쓴 안동중학 동창회 결성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2차 모임 — 1976년 10월 14일, 종로 견지동

사전에 모임의 성격과 운영 방법을 설명 듣고 찬성하는 분들만 10월 14일 12시에 종로 견지동에 모여 운영 방법과 회원 자격 등을 다양하게 논의했다.

참석 18명 — 류혁인 · 이상두 · 송보열 · 석기홍 · 김명년 · 김지학 · 김해길 · 권웅렬 · 권태수 · 권화섭 · 조주목 · 김시효 · 김규벽 · 장상섭 · 김영연 · 권태원 · 변동신 · 장원석

논의한 의안이다.

  • 회칙 제정 — 이상두씨가 책임 제작해 다음 모임에서 심의
  • 회원 자격 — 1950년도 전후 4~5년 함께 수학한 안동농림 · 안동사범 · 안동중학, 가급적으로 지인들로 구성
  • 회의 명칭 — 영호회, 경안친우회, 안동친우회, 영가향우회, 상록회 등이 제시되었으나 결정하지 못하고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합의

3차 모임 — 1976년 12월 10일, 종로 견지동 남강

참석 24명. 장소는 종로 견지동 한정식 남강.

  • 회칙 — 이상두가 내용을 설명하고 원안대로 결정
  • 회의 명칭 — 이상두 회원이 제안한 〈영가회〉와 다른 회원이 제안한 〈상록회〉를 합쳐 〈永嘉常綠會〉로 결정
  • 회장 — 3개 학교에서 학교 설립 연도 순서로. 안동농림(1933년) → 안동사범(1947년) → 안동중학(1951년) → 안동 출신 유학파. 임기 2년, 총무는 회장과 다른 학교에서 맡기로 결정
  • 사무실 — 당분간 종로구 견지동 소재 덕수빌딩에 두기로 결정. 운영비는 다음 모임에서 결정

4차 모임 — 1977년 2월 18일

임원진을 결정했다.

직 사람 학교
회장 김해길 안동농림
부회장 장원석 안동사범
부회장 이상두 안동중학
총무 권화섭 안동중학
  • 창립총회 시기 — 1977년 3월로 결정
  • 회의 장소 — 덕수빌딩 지하 연회장
  • 경비 — 본회의 산파역을 한 장원석에게 위임
  • 회의 진행 — 류동주 등으로 결정

2. 영가회의 出産(출산)

창립총회 — 1977년 3월 26일

항목 내용
일시 1977년 3월 26일 오후 6시
장소 종로구 견지동 덕수빌딩 지하 1층 연회장
참석 59명
  • 회의 진행 — 임시의장 없이 사회자가 진행
  • 창립 취지 및 경과 보고 — 장원석
  • 의결사항 — 회칙 상정(이상두 회칙 설명) 원안대로 통과
  • 임원 선출 — 준비 모임에서 결정된 사항 내용 전부 상정해 통과
  • 기타 — 금후 정치인은 회장에서 배제하고, 신입회원은 기존회원 3인 이상의 추천으로 회장단에서 심의 후 결정
  • 회비 — 초창기는 당분간 회비 없이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운영
  • 사무실 — 당분간 장원석의 덕수빌딩 사무실 무료 이용
  • 만세삼창, 폐회 선언으로 마침

참고 — 1976년 용수산 한식집 모임부터 준비 모임 세 차례와 창립총회, 그리고 1977년 5월 20일 모임까지 전액 장원석이 단독으로 경비를 부담했다.

3. 幼兒期(유아기)

  • 1977년 5월 20일 18시, 광화문 프레스센터 연회장에서 48명 참석. 신입회원 8명 인사 및 소개.
  • 1977년 12월 18일 18시, 광화문 프레스센터(신문회관) 연회장에서 망년회 51명 참석. 식대 등 경비는 회원 부담.
  • 1978년부터 3개월마다 거의 신문회관에서 개최하면서, 경비는 스폰서 제도로 초창기는 한 명씩 부담하다가 회원 수가 늘면서 2~4명씩 함께 부담했다.

모임의 규칙

  • 최초부터 헤드테이블을 없애고 일정한 좌석 없이 서로 다니면서 대화를 하다가, 회의를 시작할 때에는 가까운 의자에 앉도록 했다.
  • 마이크는 회의 사회자와 회장 외에는 사용을 제한했다.
  • 특정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용 단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고, 회원 간 위화감을 없애는 데 노력했으며 선후배의 규율을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안동 양반의 "까이"가 통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되었다.
  • 회원 입회 선발 심사도 철저히 했던 것이 모임의 성공을 기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20년, 그리고 인계

집행부는 당초 합의대로 출신 학교별로 안동농림 → 안동사범 → 안동중학 → 유학파 순으로 맡도록 했고, 회장은 권위가 아니라 철저한 봉사자였다.

안동농림의 김해길 회장이 2년 임기를 마치고 안동사범에서 인수받아야 했으나, 당시 안동사범에서 회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40대에서 대부분 교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할 수 있는 분이 두셋 있었으나 모두 극구 사양했다. 필자도 사업상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어(당시 해외에 반년 이상 출타) 결국 안동농림학교에서 20년을 김해길 회장이 계속 수고하게 되었다.

1998년 7월 10일, 마침 안동사범학교에서 회장을 인계받을 적임자가 나타났다. 필자는 강남 테헤란로 안동국수집에 김해길 · 권중동 · 석기홍 · 김명년 · 송보열 · 이준승 · 조주목을 초청해 오찬을 하면서 영가회 운영을 논의했다. 안동농림에서 20년이나 수고한 사정을 설명하고 이제 안동사범이 인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루속히 인계해 줄 것을 요청했고, 모두가 동의해 곧바로 총회를 거쳐 류목기씨가 안동사범학교 몫으로 회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인계받은 류목기 회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조직과 운영을 재정비해 명실공히 단체다운 단체로 발전시켜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그 뒤로 안동고등학교 쪽 회장, 유학파 허동진 회장, 류종묵 회장, 김봉구 회장, 김계동 회장으로 날로 발전시키고 있다.

맺음말

永嘉會의 잉태는 1976년 9월 12일이고, 출생지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 덕수빌딩이며, 탄생일은 1977년 3월이고, 두 돌까지 유모는 필자였다.

이름도 永嘉常綠會에서 바뀌었고, 초창기 모임에서 결정했던 모임의 목적과 구성원의 범위 등 단순한 고향 향우들의 친목이라는 목적이 변질되어 가고 있어 가슴 아픔을 숨기지 못하겠다. 가진 것 자랑, 벼슬 자랑하는 모임이 되지 아니하기를 바라면서, 초창기의 순수한 향우들이 서로 돕고 협력하는 모임으로 회귀하기를 기원해 본다.

창립 초창기 회원들은 당시 전부 40대 초·중반의 나이로 각자 목적을 향해 불철주야 야망에 찬 활발한 활동을 하던 회원이었는데, 이제 거의 60%는 유명을 달리했고 생존자들도 온전한 사회 활동을 못하고 있어 무심한 세월만 탄하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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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 40년사》 329~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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