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 40년사》 362~365쪽에 실린 류종묵 회원의 기고문입니다. 2026년 9월 원문과 다시 대조해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는 인명과 문장이 여러 곳 잘못 옮겨져 있었습니다(이희대→이회대, 창립 멤버→정림 멤버, 총무 권화섭→김계현 등). 한자 표기는 원문에서 알아보기 어려운 곳이 있어 한글로만 적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초겨울 날씨답지 않게 제법 쌀쌀하고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한 을씨년스런 늦은 오후, 삼성의료원에서 조문을 마치고 허전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일원역을 향해 걸으면서 안동 모임에서 만났던 잊혀져 가는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안동고 재경동창회 — 이희대 선배

재경동창회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이희대 선배다.

  • 소탈하고 겸손하며 서민적인 성격이기에 친화력이 뛰어나고 집념이 강하며 부지런한 사람이다.
  • 늘 안동을 생각하고 안동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하여 틈나는 대로 안동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 일찍이 정치에 꿈을 품고 대학에선 정치학을 전공한 뒤 의사신문·의협신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거쳐 보건행정학 석·박사 학위도 취득해 고려대·한림대·대구한의과대 교수로 있었다.

그토록 안동과 안동고를 사랑했던 그가 세상을 일찍 떠나리라고는 그 누가 생각하였으랴.

1968년 이른 봄, 관철동 대련집으로 나를 불러내어 배추전에 막걸리를 시켜 놓고 재경동창회의 필요성과 조직 구상을 열변하면서 나의 참여를 적극 설득하였다.

그는 지태욱 선배의 사법서사 사무실과 권중동 선배의 체신노조 위원장실을 분주히 오가면서, 그해 늦은 봄 무교동 중국집 태화루에서 기어이 안동고등학교 재경동창회를 발족시키고 초대 총무를 맡아 동창회의 기반 조성에 헌신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동창 사랑에 이끌려 그의 뒤를 이어 6년간 나도 총무로서 미력이나마 재경동창회 초창기 성장 발전에 시간과 젊음을 보냈다.

또한 재정이 어렵고 열악하던 그 시절 동창회의 경비를 많이 부담해 주시던 권오훈 선배가 계셨다. 그는 삼화제철의 감사로 재직하셨는데, 후리후리한 큰 키에 바리톤의 굵은 목소리를 가진 인정스런 호남아였다.

영가회 — 김해길 회장과 권화섭 선배

영가회에서는 아무래도 김해길 선배와 권화섭 선배가 생각난다.

80년도 어느 날, 창립 멤버이신 김계현 선배의 입회 권유에 따라 시민회관 커피숍에 들어서니, 초로의 깡마른 체구, 어눌한 말씨, 아주 천진해 보이는 얼굴에 옅은 웃음으로 후배의 입회를 기다리던 그 분이 총무를 맡고 계시는 권화섭 선배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안고에서 우리 동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데 좀 놀랐지만, 전혀 교육자의 엄숙한 모습이나 안동 선배들의 권위는 느낄 수 없고 언제나 겸손하고 예의바른 안동인상을 느꼈다.

그 다음 달 프레스센터 19층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께 입회 신고를 하고, 칵테일 파티의 샴페인과 양주에 취하고 김밥으로 겨우 배를 채웠던 그 밤이 뚜렷이 생각난다.

김해길 선배는 많은 안동인이 아시다시피 전형적인 안동 유림의 표본이신 분이다.

  • 항상 자신을 낮추고 안동의 전형적인 어투와 억양으로 구수하고 정다운 분이셨다.
  • 언제나 어디서나 큰 형님을 뵙는 듯 반가웠던 분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 영가회의 창립 동기를 "안동사람끼리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지내기 위해서" 라고 말하셨다.

회원 자격과 자질, 회의 목적을 얼마나 쉽고 분명하게 표현하셨는가. 그러기에 유향 특유의 자존심과 까다로움이 있는 〈안동인의 모임 영가회〉를 20년간 이끌어 주셨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김계현 형, 그는 언제나 어울릴 수 있었던 선배며 친구였다. 더러는 까다롭고 깔끔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이 많고 그렇게 격식을 따지는 분은 아니었다.

그가 80년대 초 안동에서 공화당 연수원 교수로 옮기면서 나의 잠실 아파트에 동거인 주소 등기를 하게 되어, 우리집은 25평의 작은 아파트에 가족이 열한 명이 된 일이 있었다. 그 후 직장을 대한투자신탁으로 옮긴 뒤 생소한 경제 공부를 애써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하다.

안동향우회 — 권상철 교장선생님

안동향우회 하면 권상철 교장선생님이 그립다. 선생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1989년 어려운 산고 끝에 창립한 향우회 초대회장을 맡아 주셨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고희를 넘기셨고 안양과학전문대(현 연성대학교) 운영과 대학교육계의 여러 중책을 맡으셔서 여유가 없으셨는데도 안동 후배들과 고향을 굳건히 다져 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사랑으로 안동사범 입학을 포기하고 안동고등학교 초대 교장이시던 선생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지만, 선생님께서 서울 청량공업고등학교로 전출되심에 안타깝게도 일학년 때만 훈도를 받게 되었다.

향우회 창립 시 선생님께서 갓 오십이 된 나를 이사로 추천하셨기에 '안동을 위해 봉사하라'는 스승님의 뜻으로 알고 향우회에 참여하여, 2대 박구일 · 3대 류승번 · 4대 신현수 · 5대 강민창 회장에 이르기까지 10년간 감사를 맡아 미력이나마 향우회 발전에 봉사하였다.

향우회 이야기에 빠뜨릴 수 없는 분이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2·3대 회장 시절 3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하신 김경배 선생님이시고, 또 한 분은 나와 함께 감사를 맡았던 이희필 선배시다. 김경배 국장은 안동고 시절의 나의 은사이시다. 생물 과목을 가르치셨고 단정하신 용모에 맑고 밝으시며 인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그러나 당시 향우회는 굳건한 기반 조성과 회계의 정확성이 절실한 초창기인데 은사가 실무 책임자로 계시니 난처한 경우와 민망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안동향우장학재단 — 이준승 선배

이준승 선배가 기억된다(2011년 작고). 한국전란의 혼란기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시어 일찍이 명성을 떨치신 분이다. 대법관을 역임하신 법조계의 원로이신데, 노년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셔서 고향 후진들의 향학을 지도편달하시고자 초대 이사장을 수락하셨으나 만년의 고향 사랑을 실천하시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아산병원으로 문병을 갔을 때 창밖의 한강을 바라보시며 "세월이 그리 길지 않더군. 할 일을 잘하게"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안동 9개교 친선체육대회

이 모임의 시작은 아마 1975년인가 싶다. 단초는 일 년에 두어 번 모여 몸으로 부딪치고 땀 흘리며 선후배의 유대와 정을 나누기 위한 안동고 8·9회 간의 소박한 축구 시합이었다.

경기할 만한 운동장을 물색하던 중 당시 마포 숭문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경안고 출신 김연대 선배와 김우석 씨의 신세를 여러 번 졌는데, 김 선배의 제안으로 안동고와 경안고 양교의 친선축구대회로 발전했다.

시기 참가 학교
1975년 안동고 6~9회, 경안고 1~4회
1981년 (7회) 농림학교·사범학교 참가 — 4개교
1990년 (16회) 6개교 (중앙고·여고 참가)
1995년 (21회) 7개교
1999년 (25회) 9개교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격 없이 형제처럼 뛰놀던 선후배, 동기들 중 많은 얼굴들이 고인이 되고, 남아 있는 우리들도 모두 팔순 고개를 넘나드니 인생의 덧없음을 실감한다.

지난해(2016년) 제49회 대회 때 주관 학교 동창회 김수년 회장이 경안고 김연대 선배와 나를 대회의 창립 대표로 특별히 초청하여, 오랜만에 본 대회의 성숙한 모습과 과분한 대접에 흘러간 세월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상락회

상락회(1986년 창립)는, 나는 공직자는 아니지만 상락장학회의 설립에 따라 '자문위원'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기회 날 때마다 참석하여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안동의 선·후배들과 친교할 좋은 기회를 부여받았다. 상락회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처럼 국가·사회 발전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니 기쁘기 그지없다.

맺으며

안동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요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곳이다. 나의 안동 사랑은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안동 사람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2017년 12월)

출처: 《영가회 40년사》 362~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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