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이 글은 김경한 회원께서 《영가회 40년사》(370~374쪽)에 기고하신 회고문입니다. 스캔본의 글자 깨짐만 바로잡아 옮겼습니다. 다만 유치원을 다닌 햇수(원문 '9년간')와 아버지께서 별세하신 시점(원문 '83년 후')은 스캔 숫자가 분명치 않아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어머니!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어머니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이 젖어온다.

이제는 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나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셨다. 한 분은 나를 낳아준 생모(生母)이고, 다른 한 분은 10살 때부터 함께 살아온 양모(養母)이다. 말하자면 어머니와 관련된 나의 인생행로는 보통 사람들에 비하여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사연은 이러하다.

태어나기 전에 정해진 일

우리 집안은 500년 넘게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속칭 "외내")에 세거(世居)하여 왔다. 도산서원에서 가까운 낙동강변의 광산 김씨 집성촌이다. 조부님께서는 슬하에 4형제를 두셨는데 나의 아버지께서 그 중 장남이셨다. 그런데 차남인 나의 숙부님께서 숙모님과 결혼한 지 1년여 만인 1934년 단신으로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다가 돌연히 병을 얻어 별세하셨다. 내가 태어나기 10여년 전 일로서, 그 때 숙모님은 꽃다운 23세의 나이였다. 온 집안이 그러했지만 특히 숙모님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우리 숙모님의 고달픈 인생살이가 시작되었다. 당시의 법도로서는 재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집과 친정을 오가며 서러운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태어날 조카들 가운데서 양자를 얻는 일이었다. 당시 아버지 형제분들 슬하에 아들이라고는 나의 형님 한 분 뿐이었고, 형님은 맏집의 장자라 당연히 처음부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문중 어른들이 심각하게 논의한 끝에 장차 맏집에서 언제고 아들이 나면 숙모님께 주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나의 부모님께서도 이 방침에 대해 언감생심 다른 의사를 표시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숙모님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산월이 가까우면 숙모님은 집으로 오셔서 힘든 해산 바라지를 전담하면서 아들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셨다. 그러나 이일을 어찌하랴! 어머니는 그 후 내리 딸만 다섯을 낳으셨다. 그때마다 숙모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무슨 죄인인양 숨을 죽이셨다.

그렇게 기다린지 10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내가 태어났다. 고추달린 아기를 받아내면서 숙모님의 기쁨이 어떠했으리라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숙모님은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전혀 배고픈 줄도 몰랐다고 후일 나에게 술회하셨다.

경주에서 보낸 유년

그렇게 나의 입양은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지어져 있었고, 다만 너무 어려서 좀 자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세살 되던 해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우리 가족은 안동에서 경주로 옮겨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 식구들은 수시로 "네가 살 집은 여기가 아니고 안동에 있는 작은 어머니 집이다"라고 말하고, 숙모님이 경주 집에 오시면 "너희 엄마 오셨다"고 말했다. 그처럼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킨 것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년시절부터 나는 장차 내 삶에 막연하게나마 중대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상을 했고, 또 그것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일종의 운명 같은 것으로 각인되었다.

당시 우리집 분위기는 화목하였고 경제사정도 그런대로 유복하였다. 유치원이 귀하던 그 시절에 어머니는 나를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넣어 9년간이나 다니게 하셨다. 어머니는 다소 병약하기는 하였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예쁘게 생긴데다가 마음씨도 명주고름처럼 고왔다. 막내인 나를 끔찍이 귀여워하여 항시 팔베개하여 함께 자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여 많은 누나들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차별대우를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공부를 제법 잘하여 여러 차례 상을 받자 어머니는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경주역에서 안동행 기차를

그렇게 지내던 중 내가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어느날 숙모님께서 홀연히 경주 집에 오셨다. 마침내 나를 데리러 오신 것이었다. 일찍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부모님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어졌고 어머니는 구석구석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나의 마음도 순간적으로 상당히 쓸쓸하고 참담해졌다. 정든 가족들을 떠나 낯선 집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장면에서 내가 너무 동요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그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고 이에 조금이라도 불복하는 것은 어른들에게 실망을 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뇌공작」의 결과이겠지만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지금 스스로도 신기한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며칠간 나의 책과 옷가지 등을 챙겨 짐을 싸주셨다. 초등학교에 전학수속도 마치고, 떠나기 전 날 사진관에 가서 마지막 가족사진을 찍었다. 다음날 경주역에서 숙모님과 함께 안동행 기차를 탔다. 역에 전송나온 어머니와 누나들은 모두 울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안동의 양어머니

그렇게 하여 나는 열 살의 나이에 친부모님을 떠나 안동의 양어머니께로 옮겨 살았다. 식구라고는 그 어머니 한 분 뿐이고, 새로 전학간 초등학교도 낯설었다. 집은 어머니의 친정에서 무료로 빌려준 방 두 칸짜리 작은 한옥인데 건너방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우리는 안방 하나만을 사용하였다. 양식을 해결하고 조금 남을 정도의 한 뙈기 농지 외에는 별다른 재산이 없어 생가에 살 때 보다는 훨씬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양어머니는 친어머니와는 반대로 골격이 크고 기운도 세며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고생도 잘 견뎌내고 생활력도 매우 강한 편이었다. 아무런 고정수입이 없었으므로 주로 친인척들을 상대로 당시 성행하던 계(契) 같은 것을 하여 어렵사리 생활비와 나의 학비를 조달하였다.

처음부터 양어머니는 모든 생의 의미를 오로지 나에게만 두고 사시는 것 같았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초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맹목에 가까우리만큼 지극한 사랑을 베푸셨다. 특히 졸지에 생가를 떠나 행여 내가 많이 상심하거나 방황하지나 않을까 마음 졸여했고, 하루 빨리 내가 생가를 잊고 양가를 온전히 나의 집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가급적이면 생가쪽으로부터의 경제적 원조를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가계를 꾸려나가려고 애썼는데 이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때로는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과 맹목적인 사랑이 부담스럽고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런 느낌을 가급적 내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머니에게 몹쓸짓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예외 없이 나를 경주의 생가로 보냈다. 2시간 정도 걸리는 완행열차로 경주역에 도착하면 부모님과 누나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해 주셨다. 그 때에 들으니 생가의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낸 후 아픈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밤낮없이 눈물로 보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가슴이 저려왔다. 천륜이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인가보다. 많은 식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방학 동안의 생활은 아무래도 둘이서만 적막하게 지내는 안동에서보다 즐겁고 행복했다. 그래서 개학이 되어 안동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집에 있던간에 나는 짐짓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감정표현을 자제하고 나름대로 균형감각 같은 것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가자는 곳이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 스스로의 결정으로 경북중학교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양어머니와 나는 대구로 이사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역시 나 스스로의 결정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이사했다. 말하자면 내가 가자는 곳이면 어머니는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그곳이 어디든 따라 나섰다. 어린 나이 때부터 나는 한 집의 호주요 가장이었던 것이다.

대학 2학년 때 생가의 어머니께서 병을 얻으셨다. 원래 연약한 체질로 자주 자리에 누우셨는데 그것이 심한 간경화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의술이 지금 같지 않아 백약이 무효로 여러 달 고생하신 끝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생전에 맏며느리로 7남매를 낳아 기르시느라 몸 고생도 많았고 얌전한 성품에 드러내지 않은 마음 고생도 많았을 터였다. 그 중에 나를 떠나보낸 것도 필경 작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생전에 내가 좀 더 살뜰하게 대해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임종의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양어머니께서는 나의 학비를 제때에 조달해 주셨고, 공부에 지장이 된다고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못하게 말리셨다. 졸업 후 몇 차례 사법시험에 낙방하여 산사(山寺)를 전전할 때에도 매달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생활비를 보내주었고, 그러고 나면 여유가 전혀 없어 정작 당신은 겨우 끼니만 때우는 힘든 생활을 하셨다. 감사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내가 느끼는 부담감도 엄청나게 컸었다.

부양을 받는 자리로

다행스럽게도 26세에 가까스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어머니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생토록 호된 고생을 하면서 애지중지 나를 길러 마침내 소원을 이룬 셈이다. 그 해 가을 아내와 결혼 하여 새 가정을 꾸렸다. 이어서 검사로 임관되어 그런대로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그때부터 어머니는 부양을 하는 입장에서 부양을 받는 입장으로 삶의 대전환이 이루어 졌다. 어느덧 환갑의 연세였다.

결혼 후 우리부부는 당연히 어머니를 한집에 모시고 살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손주는 완전히 할머니의 차지가 되었다. 아이는 아무런 정서적 거리감 없이 본능적으로 할머니를 따랐다. 내가 어른이 된 후로도 아버지가 계시는 생가를 아내와 함께 기회 있을때마다 찾아뵙기는 하였지만 직장생활에 쫓기는데다가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아무래도 그 횟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고생 끝에 맞이한 어머니의 안정되고 평온한 생활은 약 25년 가까이 계속 되었다. 그러던 중 내가 검찰 중견간부로 있던 1994년 돌연히 위에 종양이 발견되어 입원가료 중 몇 달 후 84세의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청상이 되신지 어언 60여년, 남달리 기구했던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10살 때부터 40년이 넘게 고락을 함께하며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며 나도 아내도 아이도 서럽게 울었다.

83년 후 친가의 아버지께서도 93세로 천수를 누리고 별세하셨다. 이로써 생·양가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같은 온도로 남아

그로부터 다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긴 공직생활을 물러나 몇 년째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덧 고희를 훌쩍 넘겼다. 그러나 이 나이에도 두 분 어머니를 회상하면 그 질긴 모정의 세월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다르셨고 그래서 나에게 남겨진 추억도 각기 색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아낌없이 쏟아주셨던 그 지극한 사랑은 똑같은 온도로 내 핏속에 남아 흐르고 있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370~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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