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유서·선배 우대 창립취지 쭈욱 이어나가야" — 영가회 창립 주역 장원석 원로회원

〈기획인터뷰〉 영가회 창립 주역 장원석 원로회원 · 《영가회보》 8-9호 7면

2024年 01月 22日글 · 편집실

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9호(2024년 1월 22일 발행) 7면 〈기획인터뷰〉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의 '[기획대담]'과 제목의 '죽 이어가야'는 지면대로 〈기획인터뷰〉와 '쭈욱 이어나가야'로 바로잡았습니다. 리드와 약력의 생년·나이 표기는 싣지 않았고, 리드의 '한 한 식당'은 '한 식당'으로 고쳤습니다. 인물 사진에는 지면에 설명이 없어 이름을 달았습니다.

대담 장면 장원석 원로회원(왼쪽)과의 인터뷰

저물어가는 2023년 12월 장원석 원로회원을 경기 성남의 한 식당에서 문상부 영가회장과 함께 만났다. 나이가 무색하게 생각보다 훨씬 젊었고 기억력도 또렷했다. '바다의 사나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우리나라가 원양어업 개척이 한창이던 1960년대 5대양6대주를 누비면서 활동했다. 지금도 시간이 나면 지인들과 만나고, 틈이 날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면서 삶에 보탬이 될만한 자료를 찾아보고 써서 거의 매일 보내는 왕성한 집필과 활동을 하고 있다. 인터뷰 자리에서도 영가회 회원들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틈틈이 준비한 서예작품과 개인자료가 쇼핑백으로 가득했다. 영가회의 잉태에서부터 탄생, 그리고 초창기 숨겨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화를 정리한다.

― 영가회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립에 얽힌 얘기부터 풀어 나가주시지요.

△영가회는 1977년 창립되었지요. 그 이전에도 재경 안동인들간 친목모임이 있어야 한다는데 공감대는 있었지.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두세차례 모이기는 했지만 밥만 먹고는 흐지부지 되기가 일쑤였어요.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안동인들의 특수한 이른바 '4대 꼴데기(잘난체, 아는체, 귀한체, 가진체)' 때문이라고 볼수 있지요. 그렇게 1970년대 중반까지 아무런 모임도 없이 지나고 있었지요. 나는 당시 어느 정도 시간적·경제적 여유도 있고 해서 '고향을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그러던 차에 1950년대 전후세대를 중심으로 안동농고·안동사범·안동중 3개교를 다녔던 학생들 중에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만드는 것도 뜻이 있을 듯 했지. 그래서 당시 마음적으로 친했던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있던 류혁인(문화공보처 장관 역임)·이상두(안동중 졸업, 대학교수)형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내 생각을 전달하고 의견을 구했지요. 그랬더니 혁인 형이 "아주 좋은 생각이지만 어려울 것"이라고 한마디로 만류하더군. 그 이유를 두가지로 요약하자면 그 잘난 '4대 꼴데기'를 가장 먼저 짚더라구요. 그리고 두 번째가 모임에 필요한 자금이었어요. 당시 우리는 40대중반으로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도 분주한데 거금을 누가 부담하고 누가 앞장서 희생해줄 것인가를 얘기하더군요. 한마디로 "어려운 일일세"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우선 모임을 갖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인 4대 꼴데기는 제쳐두고 자금은 내가 부담할 것이니 류형이 참석할수 있는 날짜를 알려주면 생각되는 몇사람을 초대해 의견을 모아보겠다"고 하고서는 헤어졌어요.

― 그것이 영가회 '잉태'라고 보면 되겠군요.

△ 이후에 안동 3개교 출신중에 저와 친교가 있는 56명 때로는 10여명을 초청하여 45차례 오찬 모임을 가지면서 의견을 나누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지. 이상두형이 구체적으로 회칙을 만들었고요. 회장직은 학교 설립연도순 즉 안동농림, 안동사범, 안동중 순으로 번갈아 하되, 해당학교 회원들이 추천하는 사람이 맡기로 했지요. 총무는 회장출신 학교가 아닌 출신으로 하고요. 그렇게 한뒤 1977년 3월26일 회원 50여명이 당시 내가 소유하고 있던 종로의 덕수빌딩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지. 창립당시 명칭은 '영가상록회'였고 순수한 친목모임이었지요. 이후 수년간 매년 신년회와 송년회를 하면서 회원수도 많이 늘어났지요.

― 영가회 창립당시 회원들 중에는 정치·경제·학계 전반에서 저명인사들이 많았다지요.

△당시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요인물들의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4대 꼴데기 때문에 실패한 선배들의 경험을 교훈삼아 '체'를 없애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 그래서 회원은 장유유서(長幼有序)와 학교의 선후배 관계를 철저히 지키도록 노력했어요. 모임에 이른바 '헤드테이블'을 없애는 것도 그중 하나였지. 정기총회·망년회 같은 모임에서 지정석을 마련하지 않았고, 회의 시작전 (칵테일 파티처럼) 테이블을 다니면서 서로 인사하고 담소하다가 회의가 시작되면 가장 가까운 아무 자리에라도 앉으면 되게 했지. 마이크는 사회자와 회장 이외에는 안동군수가 참석한 자리면 인사 정도나 할 정도로 사용을 통제하면서 모임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였지요.

장원석 장원석 원로회원

― 모임 비용 부담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내가 그때 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때였어요. 영가회 잉태부터 5~6차례 준비모임 경비, 창립총회 경비, 2년간 5회 총회 모임 경비등 전액을 혼자서 부담하였어요. 또 3년간 영가회 사무실을 무료임대하는 등 비용 일체를 부담했지요. 영가회가 정착될 때까지 회원에게 한푼도 부담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회원들도 부담없이 나왔고, 모임도 정착될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예작품들 장원석 회장이 영가회원들에게 주기 위해 직접 쓴 서예작품들

― 앞으로 영가회 발전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지금의 문상부 회장 중심의 집행부가 잘하고 있어요. 특별히 류종묵 회장은 개인사업도 잘하는데다 훌륭한 리더십으로 원로회의를 자체적으로 조직해 원로회원이 많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류종묵 회장이 고마울 따름이죠. 원로회원들이 많이 다시 참석하고 있습니다. 창립한지 48년의 세월이 흘러갔네요. 창립당시 40대중반이었던 회원은 80~90세의 노인이 됐고, 그나마 과반수 이상이 유명을 달리했어요. 지금은 2세로 이어진 영가회가 창립총회 때의 운영정신을 계승하여 3세,4세로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 있겠지만 집행부를 중심으로 영가회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장원석 원로회원 약력

*장원석 원로회원은 1954년 안동사범학교 본과에 이어 1958년 국립부산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원양어업개척선단에서 실습항해사로부터 시작해 항해사·선장·선단장을 두루 맡아보았다. 원양어업 창사 중역으로 경영에 참여했다가 1969년에 일본 제일의 재벌 미시비쇼지(三菱상사)에서 무담보 신용차관으로 당시 3000만불이라는 거금을 지원받아 원양어업을 시작했다. 그후 37년여간 원양어업에 종사하면서 한때 1억불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한에콰도르공화국 명예영사, 한일친선협회 한국측 중앙상임위원, 한일어업회담 한국측 민간대표단장 등 외교분야를 비롯해 다수의 어업협정에 한국측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국내 각종 수산관련 단체·협회장을 맡으면서 수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한때는 지인들의 권유로 정치에도 몸을 담아 전두환대통령 정부 시절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1~3기 위원, 민정당·자민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수산분과위원장, 제13대 국회의원 전국구 예비후보로 선출되기도 했다.

또 안동사범, 병설중, 안동교대, 농대, 안동대학을 5개동창회를 통합한 안동대학교 총동창회 회장을 맡아 초기동창회 기반을 조성했다.

사회활동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봉사단체인 '세종라이온스'활동을 꼽는다. 여기서 창립멤버로 총재까지 38년간 봉사했다. 또 바다에서 순직한 수대 동문 선후배들의 넋을 기리는 '백경탑'을 모교 교정에 세워주기도 했으며, 장씨대종회 회장으로서 장학사업을 확대하고 중국 스다오(石島)에 '장보고 기념관'을 건립키도 했다. 대한노인회 고문으로 이심(李沁) 전 대한노인회 회장과 함께 노인들의 권익옹호에 기여한 것도 큰 보람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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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9호 (2024년 겨울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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