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6호(2023년 4월 15일 발행) 7면 기고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필자를 '편집실'로 적었던 것을 지면대로 류을하로 바로잡았습니다.
서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류을하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안동 지역의 습속과 그에 대한 평판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조선 전기에 있은 세조와 성종 등의 언급은 매우 긍정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안동지역에 대해 '땅이 메마르고 풍속은 근검하여 농상(農桑)에 힘쓴다'라고 하였다. 「세종지리지 안동대도호부」
조선의 7대 국왕 세조는 경기관찰사 김연지에게 '경상도는 습속이 근검하며, 농사짓는 태도에 따라 상농(上農)·차농(次農)·타농(惰農)으로 차별하여 대우한다'는 취지의 유시를 내려 권농(勸農)을 독려한 바 있다. 「세조실록 4년 10월 9일자」
그리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재위 3년 의정부에 전지를 내려 영남과 안동이 근검절약의 모범이라고 예시하였다. 이 전지에서 성종은 '삼국 이래 백제가 가장 사치하고 지도자들이 음탕·교사(驕奢)·호주(好酒)함으로써 나라가 망하게 되었고, 지금의 전라도 역시 완악한 기풍과 풍속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어서 '신라는 풍속이 근검에 힘쓰고 화려하게 꾸미기를 일삼지 않아 천년을 이어갔는데, 지금의 경상도 역시 순후한 기풍과 질박한 풍속이 전해진 다스리기 쉬운 지역'이라고 했다.
또 안동인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안동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고생을 참으며 가을과 겨울에는 죽을 먹으면서 농사철에 대비하여 저축하므로 모든 것이 비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그러한 점을 본받고 스스로 노력한다'고 극찬한 것이다. 「성종실록 3년 8월 23일」
영남에는 안동에 버금가는 경주·상주·진주 등 큰 고을이 있었음에도 성종이 안동만을 본보기로 예거한 것이 돋보인다.
농경사회에서 땅이 메마르다는 것은 결정적인 악조건이었다. 따라서 근면하고 검소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근검하지 않고 생존을 이어가는 방법은 거짓이나 무력을 사용하여 남의 것을 빼앗는 약탈뿐이다. 그런데 안동은 그러한 야만적인 방법보다는 근검과 학업을 통해 스스로를 키우며, 꾸준히 살아가는 모범적인 지역의 모습이었다.
열악한 환경을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던 이러한 생존 방식은, 필연적으로 농업 기술을 발달시키며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시킨다.
그래서 '조선 인재의 절반(折半)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안동에 있다'「택리지」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 류을하 / 서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출처: 《영가회보》 8-6호 (2023년 봄호) 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