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4호(2022년 10월 15일 발행) 2면 특별기고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남영찬 남영찬 —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재경안동향우회 감사

삶의 터가 물에 잠기고, 친구들이 떠나고, 옛집이 무너져도 고향은 고향이다. 내 고향은 안동군 월곡(月谷)면 도곡2리이다. 태어나서 대동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랐다.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원천은 그곳의 흙과 물, 바람이다. 현재는 안동호 바닥에 수몰되어 있다. 안동댐 담수가 시작된 1975년 늦여름 오후 혼자 자전거를 타고 고향을 찾았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학교 부지는 이미 자연의 일부였다. 이곳저곳을 찾아 추억을 소환하였다. 그러다가 귀가 시간을 놓쳤다. '돗질'에서 마지막 담배 농사를 짓던 초등학교 선배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밤 내내 고향과의 이별 의식을 했다. '안동스러움'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곧 수몰될 고향은 내게 삶의 전범(典範)과 화두(話頭)를 아울러 선물했다.

삶의 전범 중의 하나는 '염치'이다. 안동은 염치가 법규를 앞서는 곳이다. 살면서 안동 사람으로서의 품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경희대 이동규 교수는 조선일보의 두줄 칼럼에서 '염치는 인생 법정에서 채택되는 양심의 증거이자 용기의 원료'라고 했다. 예의와 염치를 갖추고자 한 자세와 노력이 치열한 인생 법정에서 오늘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의 하나이다.

아직도 타파(打破)하지 못한 화두는 '옛것'에 대한 성찰이다. 안동은 옛것을 숭상한다. 나 자신을 포함한 안동 사람들이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유안진 시인)'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늘 저어되었다. 사법시험 합격 후 20년간 법관의 길을 걷다가 기업인으로 변신한 10년은 이 화두를 붙잡고 고뇌한 시기였다. 왜 안동 사람이 만든 '위대한 기업'이 없을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깨달음의 실마리를 지금도 찾고 있다. 그 하나가 안동 선비정신의 원형이다. 안동은 '조촐한 기와집과 정갈한 초가집마다 독실하게 공부하는 선비들이 있던 곳'(이인화 장편소설 '2061년' 중에서)이다. 그 선비들은 흔히 상상하는 폐쇄적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조선은 경제에 우호적인 제도와 문화가 배척되고, 지배층에게는 경제 마인드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한 조선이 '무서울 만큼 나태한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영광과 부활의 꿈을 지켜온 사람들'(이인화)이 바로 안동 선비들이었다. 즉, 그들은 개혁과 창조적 혁신의 DNA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강남농법'을 몸소 실천하여 부를 축적하여 서원혁명을 일으킨 퇴계 선생이 그 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인이 주축이었던 안동 선비들은 개혁과 창조적 혁신의 DNA를 지역적·학파적 차원을 넘어 나라 전체의 경제에 영향을 미치도록 제도화하지는 못하였다. 당시의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중앙의 정치 제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안동의 '옛것'에 대한 계승과 논의는 이 점에 착안하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안동의 경제적 발전과 위대한 기업의 출현도 가능할 것이다.

— 남영찬 /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재경안동향우회 감사

출처: 《영가회보》 8-4호 (2022년 가을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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