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회 탄생 노변야화(爐邊夜話) — "45년 영가회가 자체 사무실도 없다니…"

영가칼럼 · 대한노인회 고문, 영가회 창립회원 장원석

2022年 07月 15日글 · 장원석

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3호(2022년 7월 15일 발행) 8면 〈영가칼럼〉을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필자를 '정창식 부회장'으로 잘못 적었던 것을 지면대로 창립회원 장원석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장원석 장원석 — 대한노인회 고문, 영가회 창립회원

30대 중반에 원양어업 회사를 경영하면서 40대 후반에 사업기반을 전자·식품 회사로 확장하면서 어느 정도 사업기반이 견고해지게 됐다.

그때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당시 영주·의성·예천·봉화 등지에서는 화수회나 향우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세(郡勢)가 월등한 안동은 별다른 모임조차 없었다. 그래서 친목단체를 만들 것을 궁리하던 중 마침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던 안동중 동기생 류혁인(작고)향우와 오찬하는 자리에서 의견을 내놨다. 류수석은 대뜸 "발상은 좋으나 어려울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 선배들도 수차례 모임을 가져 보았으나 결국에는 안동사람 특유의 '꼴대기 4체'(잘난체, 갖은체, 아는체, 높고 귀한체) 때문에 모임이 흐지부지된다. 자네도 고생만하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일세"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비도 상당히 들텐데 모임하자고 돈 내라고 하면 돈 낼 친구가 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충고는 참고하고 감사하네. 어쨌든 장부가 마음먹은 일이니 내가 한번 해볼터이니 류수석께서는 모임 날짜를 정해주고, 참석하고, 후원해주게" 그렇게 얘기하고 헤어진 것이 영가회 잉태의 시발이었다.

그후 안동농림학교, 안동사범학교, 안동중학 등 각 학교를 대표할 56명과 45차례 자리를 함께 하고 동의를 구했다. 회원은 1950년대 전후에 안동시내 각급학교에 3년여간 수학하던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당시 초창기 모임은 종로 한정식집 남강에서 주로 했는데, 경비는 일체 내가 부담했다. 비영리단체 모임의 준칙으로 종친회는 세대(항렬) 우대, 동창회는 입학기수 우대, 고향모임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철저히 준수하기로 했다. 운영주체(회장)는 학교 창립순(안동농림, 안동사범, 안동중학)으로 하되, 임기는 3년으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친목회가 정상적으로 될때까지 모든 경비는 내가 부담키로 했다.

창립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상두 교수(작고, 안동중학 출신)가 모임의 명칭을 '영가상록회'로 하자고 제안했고, 회칙도 직접 만들었다. 사무실은 모임이 정상적으로 정착할 때까지 내가 소유했던 종로 덕수빌딩 3층에 두기로 했다. 준비를 완료하기까지 약 9개월이 소요되었다. 준비를 완료하고 1977년 3월 26일 창립총회를 소집했다. 회원은 50여명이었다. 안동농림대표로 김해길을 회장으로 미리 내정해놓고, 덕수빌딩 회의장에서 창립총회를 만찬형식으로 개최했다. 부회장에는 김명년(안동농림), 필자인 나(안동사범), 이상두(안동중) 출신으로 3명을 집행부로 안배해 위화감이 없도록 했다. 창립초기 경비는 2년간은 필자가 전액 부담했다. 이후에는 회원 개인 또는 2~3명이 함께 자발적이면서 경쟁적으로 경비를 부담했다.

이같은 모임이 입소문을 타면서 안동 출신 내로라 하는 선후배들이 입회를 서로 희망하면서 영가회는 엄선해서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후 영가상록회는 영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45여년 세월동안 학교 순으로 맡기로 했던 회장도 당초 약속대로 김해길 회장에 이어 류목기(안동사범), 금창태(안동고)로 이어지고 다시 8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50여명이던 초창기 회원은 이제 3분의1이 겨우 생존해 있을까. 더구나 대부분이 병고 등 사회활동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영가회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듯하다. 현 집행부에 창회자(創會者)로서 2가지만 건의하고 싶다.

첫째는, 안동출신 지성인들 300여명이 모인 명예로운 단체인 영가회가 45년을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구심점이 될 자체사무실 하나 없이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회원인 나부터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회원들이 모두 사무실 확보에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무실을 확보하면 십시일반 기부한 회원의 기부액수를 기록한 게시판을 후배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사무실 벽에 게시하고, 기부자의 기록을 영가회보나 향우회지 등에 최대한 홍보해서 고마움을 전하는 행사를 계획하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문상부 현회장 임기 중 선배들이 못한 일을 반드시 성사시켜 주었으면 한다.

둘째는, 영가회가 안동을 고향으로 둔 회원임을 자랑할 수있는 친목단체로 운영해 주기를 바란다. 영가회의 초창기 모임부터 갖은 어려움을 견뎌내고 여기까지 온 것은 과거 영가회 창립이전에 선배들의 모임의 실패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적극 시정한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안동인의 '꼴대기 4체'를 철저히 배제하고 안동 유교후손답게 장유유서의 질서를 지켜주어 영가회가 우리 손자, 증손자 대까지 죽 이어가는 단체로 성장해주길 간절히 기원한다.

— 장원석 / 대한노인회 고문, 영가회 창립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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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3호 (2022년 여름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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