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선생의 새(鳥) 그림 현판 1 — 도산서당

〈안동문화〉 김호태 안동문화지킴이 이사장 · 《영가회보》 8-10호 10면

2024年 04月 17日글 · 김호태

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10호(2024년 4월 17일 발행) 10면 글을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전 판에서 '김홍태 (전통문화국가 위원·안동시)'로 적었던 필자는 지면대로 김호태 안동문화지킴이 이사장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지면에 설명이 없는 현판·글자 확대 사진에는 편집실이 설명을 달았습니다.

김호태 안동문화지킴이 이사장 김호태

퇴계 이황 선생은 60대에 고향으로 돌아와 아주 작고 소박한 '陶山書堂(도산서당)'을 지으셨다. 그런데 이 현판 안에는 새(鳥)가 세 마리나 그려져 있다. 퇴계 선생께서는 왜 현판에 새 그림을 그렸을까.

陶山書堂 현판 도산서당 현판 '陶山書堂'

현판 글씨는 정자(正字)인 해서체 같으면서 고대 그림문자인 전서체로 보기에도 어렵다. 그 중간인 예서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퇴계 선생 그림 글씨는 아주 흥미롭다. 山(산) 자는 얼핏 보면 산(山) 모양 같지만, 곡선을 이루는 아래 획을 보면 왕관을 닮은 꼴이다. 그리고 書(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 曰(왈) 안에 새가 한 마리가 날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山 현판 글씨 '山'

山 아래 획 '山'자 아래 획 확대

두칸 반의 작은 서당에 어울리는 세로현판(22×54cm)은 작지만 깊은 의미로 담고 있어야만 될 것 같다.

제자들이 생활할 농운정사는 햇볕이 잘 드는 앞쪽에 짓고 정작 선생이 자신이 거처할 도산서당은 뒤쪽으로 물러나 습하고 그늘진 산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도산서당은 크기뿐만 아니라 높이까지도 농운정사보다 낮은 작은 집이다. 연꽃이 피는 작은 연못 정우당(淨友塘), 소나무가 울창한 산자락에 대나무·국화·매화를 심은 화단 절우사(節友社)를 만들고 자연을 벗하며 생활했던 퇴계 선생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림 글씨 현판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본다.

도산서당 도산서당 전경

도산(陶山)

陶 현판 글씨 '陶'

도자기와 질그릇을 의미하는 도(陶)와 정자관 모양의 산(山)자가 만난다. 선생은 정자관 정도는 쓸 수 있는 학자, 지금에 대학 정교수 정도의 학식을 가진 대학자들을 많이 기르고 싶은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도공이 크고 질 좋은 질그릇을 빚듯이 퇴계 선생도 정자관을 쓰고 세상을 지도할 훌륭한 인재를 기르고 싶었을 것이다. 군자삼락(君子三樂) 가운데 천하에 가장 훌륭한 인재를 교육(得天下英才而教育)하고자 했던 선생의 포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실제 제자 가운데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지휘했던 학봉 김성일, 명나라 지원군 협상으로 왜란을 막았던 서애 류성룡 등 나라의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서당(書堂)

書 현판 글씨 '書'

堂 현판 글씨 '堂'

서(書)자는 붓(聿)의 가로 획(一)끝이 하늘을 향해 있고, 왈(曰)자 안에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기 위해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다. 새는 날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의 날갯짓을 해야 한다. 익힐 습(習)자는 날개(羽우)와 일백(百, 白)을 모아, 또 다른 한 뜻을 나타내는 '회의(會意)'라는 방법으로 만든 글자이다. 새가 날개짓을 배우기 위해 수천 번의 반복을 하듯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미다.

퇴계 선생은 새 모양을 글 서(書) 자에 그려 넣어 제자들에게 하늘을 섬기며 끊임없이 실천을 표현했다. 당(堂)에는 갓 머리(宀)위에 다시 두 마리 새를 더 그렸다. 서당이란 글자에는 새가 세 마리나 그려져 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의 반복 학습과 실천을 강조했던 선생의 삶이 서당이란 글자에 오롯이 표현되어 있다. 퇴계 선생은 무슨 책이든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읽어,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선생은 서울에 와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접하고 하루에 세 번의 끼니때를 제외하고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 없이 반복해 읽고 자기 몸에 배도록 하여 마음속에 길이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득하여 학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공자(孔子)가 주역(周易)을 삼천 번이나 읽어서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와 통하는 이야기다. 올곧은 선비가 희생되던 사화의 시대에 선생의 간절한 바람은 '書堂(서당)'이란 두 글자에 새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4살 때 갑자사화(1504년)를 시작으로 19살 때 기묘사화(1519년), 45세에 을사사화(1545년), 정미사화를 겪으면서 조광조, 권발, 김종직, 이언적, 김안국 등 많은 선배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보았다. 특히 을사사화에 존경하던 형님 온계(溫溪) 이해(李瀣)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퇴계 처조부 권주는 사약으로 죽게 되자 처조모 이씨는 남편 권주를 따라 자결하게 되고, 장인 권질은 평해로 귀양을 하는 모습을 몸소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화 속에서 퇴계 선생이 바랐던 세상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도자와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퇴계 선생은 왕권과 손을 잡은 못된 신하들이 꾸미는 사화(士禍)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인물이다. 서로를 모함하며 살육하는 조정의 대신들을 보면서 퇴계 선생이 바랐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이권 때문에 수많은 선비가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퇴계 선생은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갈 사람들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 김호태 / 안동문화지킴이 이사장

함께 보기

출처: 《영가회보》 8-10호 (2024년 봄호) 10면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공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