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7호(2023년 7월 15일 발행) 4면 〈기획인터뷰〉를 지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원문 리드의 생년과 나이 표기는 싣지 않았습니다. '풍림화섬(주)에 이어 이어'는 '이어'로, '재미나는 애기도'는 '얘기도'로 바로잡았습니다. 이전 판의 '[기획대담]', '영가회 4대 회장' 표기는 이 지면에 없는 내용이라 뺐습니다.
허동진 우당장학문화재단 이사장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허동진 풍림화섬(주) 전 회장은 개인장학재단인 우당장학문화재단을 운영해오고 있다. 재단설립 이전인 1971년부터 고향인 안동 녹전중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으니까 장학금 지급 역사로만 따지자면 50년이 훌쩍 넘는다. 한해동안의 수혜대상도 초·중·고교생 20여명씩 총액이 2000만원에 달한다.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허회장의 호를 딴 우당장학금은 계속 안동의 인재양성에 일익을 담당해가고 있다. 문상부 영가회장과 함께 서울 서초동 조용한 한식집에서 허회장을 만났다.
― 어떻게 해서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학교시절을 어렵게 보내고 6,25동란을 거친 세대라서 그런지 인재양성에 평소 뜻을 많이 둬 왔습니다. 돈이 조금 생기자 후학 양성과 인재육성 사업을 제대로 해보자고 했구요. 첫단추는 1968년에 녹전면 출신 향우들이 녹우회를 설립, 그해 처음 녹전중학교 학생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것이었지요. 장학사업을 본격화한 계기는 1975년부터입니다. 코오롱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인데 모친 회갑연 축의금이 1억원 들어왔어요. 당시로는 큰돈이었지요. 돌려주지도 못해 뜻있게 써보자는 취지에서 '동진장학회'를 설립하고 녹전중학교, 녹전초등학교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2003년에 우당장학문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 학교생활이 어려웠다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수 있을까요.
△제가 녹전에서 태어났지만 입학전까지 일본에 있다가 취학전 고향으로 돌아와 녹전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어요. 그런뒤 4학년때 삼촌이 있던 서울로 와서 초등학교를 마쳤지요. 서울에서 중학교 2학년때 6·25 한국동란이 터졌어요. 그래서 피난한다고 혼자 걸어서 고향마을로 내려갔다가 부모님도 뵈었지요. 9·28 서울수복후에도 서울에 오지 못하고 대구에서 연합중학교를 졸업한뒤 그곳에서 대학교까지 다녔습니다.
허동진 이사장 인터뷰
― 장학사업 규모를 얘기해주셔도 될까요.
△고향인 녹전초등학교와 녹전중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가정형편이 어렵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 매년 20여명씩을 선정하여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은 안동시내 8개고교에 1명씩 선정하고 있습니다. 작년의 경우 초등학생 3명에게 30만원씩, 중학생 9명에게 50만원씩, 고등학생 5명에게 100만원씩 19명에게 지급했어요. 고등학생은 졸업생을 대상으로 할때는 200만~250만원씩 줘오다가 2017년부터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면서 지급단가를 줄였습니다. 장학금 지급규모는 연간 2000만원쯤 됩니다. 2003년 재단을 설립하면서부터 매년 그정도 수준입니다. 재단설립후 올해까지 초등학생 97명, 중학생 181명, 고교생 97명, 대학생 1명등 모두 376명에, 2억9780만원이 지급됐습니다. (문상부 영가회장이 우당장학재단은 안동에서 개인장학금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고 귀뜀했다)
― 장학재단을 운영하면서 재미나는 얘기도 있었을 텐데요
△우당장학재단 설립전인데요. 그때 장학기금을 녹전중학교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누가 사슴을 사서 분양하면 은행금리보다는 높을 것이라고 얘기하더군요. 그러자고 하고 당시 러시아산 큰 사슴 '엘크'를 구입해 분양해줬다는데, 1년도 안돼 장학기금의 원금도 안남았다고 연락을 주더군요. 내친김에 진짜 본격적으로 장학사업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으로 2003년에 3억원을 원금으로 해서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10년후인 2012년에 2억원을 더 투자해 현재 기본기금 5억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녹전중학교에서 고맙다고 학생들이 직접 키웠다면서 닭과 계란을 보내오기도 하더군요. 수혜학생들로부터 감사의 편지도 여러차례 받았구요. 이런저런 사정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김휘동 안동시장께서 감사패까지 받아 많이 쑥쓰러웠습니다.
― 장학재단을 설립하려면 기금도 어느정도 있어야 했을 텐데. 사업적으로도 성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경북대 정치학과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영남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했습니다, 4.19혁명 직후라 시국이 어수선할 때였지요. 그뒤 서울에서 서울신문사 등 기자 생활을 9년쯤 하다가 코오롱상사 전신인 삼경물산(주)에 들어갔다가 퇴사한뒤 1985년에 섬유업체인 풍림화섬(주)에 이어 풍림섬유(주)를 설립해 경영을 맡아왔습니다. 섬유산업이 호황기를 구가하던 때는 베트남 호치민에 '풍림베트남'까지 두었고, 전체 종업원이 350명에 달할 때도 있었지요. 그때 영가회 제2대 회장인 류목기 회장과 함께 영가회 부회장을 맡아봤습니다.
―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2012년 부인과 사별한뒤 나이도 있고 해서 회사를 모두 정리하고, 그후 개인재산 정리도 말끔히 끝냈습니다. 지금은 하루 1만보 걷기와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건강관리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헬스클럽팀들과 고향 가까운 문경새재에 한달에 2회정도 가서 맨발걷기도 합니다.
참, 장학금을 주는 자리에 학생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있는데, 들려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약하자면 "세계화라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해서는 안된다. 천재 1인이 1000만명을 먹여살린다. 회사도 인재 1명을 확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세계화에 적응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어학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외국어를 마스터한다는 생각을 해라. 네덜란드 학생들은 3개 외국어를 한다. 어학을 해놓으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는다. 최고의 기술을 익혀라.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세계 1등을 한다는 생각으로 해라"이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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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가회보》 8-7호 (2023년 여름호) 4면
